가스트로노미의 어원 가스트로노미는 고대 그리스어 ‘가스트로노미아’에서 유래한다. BC 4세기경 그리스의 시인 아르케스트라토스는 시의 형식을 빌려 음식과 식재료에 관하여 노래했다. 아르케스트라토스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미식가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2000년이 넘게 지난 후 프랑스에서 미식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단어가 다시 생명을 갖게 되고 가스트로노미는 세계의 미식을 이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가스트로노미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프랑스 미식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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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모 셰프(앤드다이닝, 서울)가 재현한 누벨 퀴진
– 자크 라믈루아즈(Jacques Lameloise)의 ‘릭과 물냉이를 넣은 아스파라거스 가스파초’를 재현하였다.
로브스터 에스카비체를 조금 더 전통적인 모양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아스파라거스와 물냉이 가스파초 대신
완두콩과 민트를 사용하고, 완두콩을 일부 준비했다.
다음 허브 오일을 이용해 전통적인 프레젠테이셔닝으로 마무리하였다.

에스코피에가 19세기에 프랑스 음식을 완성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그렇다면 에스코피에 이후는 프랑스 요리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건지 의아스러울 것이다. 프랑스 요리를 음악에 비유하자면 20세기의 요리사는 현대의 연주가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 바흐나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창의성을 전개할 방법이 없었다. 노력해도 새로운 걸작을 만들어낼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혁신이란 완성된 것을 파괴하는 형태로 만들어지게 된다. 새로운 문화 사조를 설명할 때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네오, 뉴, 누보, 모던 등이다. 이러한 단어가 앞에 붙는 사조는 그 수명이 짧다. 길어야 한 세대 정도일 것이다. 모더니즘의 모던은 원래는 현대라는 뜻이지만 몇 십 년 지난 모더니즘은 근대를 의미한다.1970년대에 시작된 누벨 퀴진(영어로 new cuisine)의 누벨이라는 단어의 운명도 그러하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17세기에도 누벨 퀴진 바람이 분 적이 있었고 이후에도 요리사들은 계속 누벨 퀴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요리가 새롭다는 것을 강조하곤 했다.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20세기 후반의 누벨 퀴진은 현재에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흐름이다. 오트 퀴진의 시발점이 프랑스혁명 이후라고 한다면, 누벨 퀴진의 시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 할 수 있다. 누벨 퀴진은 가스트로노미가 대중화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이 호텔업과 함께 발전하였는데, 처음에는 영국인이 주 고객이었지만, 세계대전 이후는 미국인이 프랑스 관광과 미식의 주요한 소비자가 된다. 여기에는 1900년 초에 발간된 레스토랑 가이드북 ‘미슐랭가이드’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극단적으로는 미식 취미가 미슐랭화되었다고도 표현할 정도다. 1936년에는 유급휴가법 시행으로 소시민과 근로자가 여행을 즐기게 됨에 따라 미식의 대중화가 가속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이 급발전하면서 과학만능주의가 된다. 현대인은 점점 더 바빠지게 되고 절제된 식사를 하게 되었으며 이상형 체형도 바뀌게 된다. 19세기에는 비만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의사가 권장하는 합리적인 다이어트가 유행하고 패션에서는 가는 허리와 평평한 배를 강조하였다. 또한 유통 수단의 발전과 냉장 방법의 발달로 더 신선한 식재료 구입이 가능해짐에 따라 채소 비중이 커지고 소스의 사용보다는 재료 본연의 맛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맛있게 먹고 살찌지 않는 요리가 각광을 받게 된다. 누벨 퀴진에서는 요리의 양이 줄고 기름진 재료는 사용하지 않고 소스는 고기나 채소의 농축액으로 대치하였으며 채소가 재평가되고 전분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 경향을 후원한 것은 새로운 레스토랑 발견에 힘을 기울인 레스토랑 가이드북 ‘고미요(Gault et Millau)’였다. 신문기자이자 음식평론가였던 앙리 고와 크리스티앙 미요는 미슐랭의 가치관과는 반대의 입장을 가지는 새로운 가이드북 ‘고미요’를 1962년 창간하게 된다. 또한 1970년대 초 누벨 퀴진의 십계명을 발표한다.

이러한 누벨 퀴진의 정신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혁명적이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명적이었다. 이제 모든 손님이 같은 메뉴를 시키는 시대는 끝났다. 요리사들은 충실하게 에스코피에의 고전요리를 반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요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누벨 퀴진의 영향으로 고기, 생선, 채소를 모두 가늘게 썰어 한입 크기로 만드는 것이 대유행하게 되었고 와인도 글라스로 제공하고 요리와의 마리아주를 중요시하게 된다. 그리고 므뉘 데귀스타시옹(menu dgustation)이 등장한다. 므뉘 데귀스타시옹은 영어로는 테이스팅 메뉴(tasting menu)를 말하는데 작은 포션의 각기 다른 접시가 7~8개 계속해서 나오며 각 코스는 요리사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로 구성된다. 마지막은 화려한 디저트 코스로 마무리한다.

이러한 누벨 퀴진의 서비스 방식은 요즘 대부분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채택하고 있다. 메뉴판을 펼치면 가장 뒤쪽에, 가장 높은 가격의 셰프 테이스팅 메뉴라는 페이지가 자리한다.

그러나 누벨 퀴진은 혁신적인 만큼이나 비판도 많이 받게 되었는데, 요리의 변혁이 지나쳐 수단이 목적으로 바뀔 정도였다. 적은 양으로 대충 조리해서 접시에 예쁘게 담아 비싸게 받으면 누벨 퀴진이라고 생각하는 요리사도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방을 없앤 요리는 풍미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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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터에 글레이즈한 계절 야채, 서머트러플, 페리고드 소스를 곁들인 소고기 스테이크
 누벨 퀴진 시절의 셰프들이 많이 하던 형태를 조금 더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다.

누벨 퀴진 이후 가스트로노미가 혼미의 시대에 들어섰다. 긍정적 시각으로 보면 다양화의 시대를 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에스코피에에서 완성된 프랑스 요리가 누벨 퀴진 이후에는 셰프의 솜씨에 따라 옷만 갈아입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는 프랑스의 위대한 셰프들이 미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초청을 받으면서 프랑스 요리를 전파하게 되었고 21세기에는 미식의 민족주의라 할 정도로 다양한 미식 사조가 나타나게 된다. 누벨 퀴진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누에바 누벨 퀴진으로 발전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이 세계 미식의 중심지가 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요리가 전혀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의 한국 신문에서 이 누벨 퀴진을 언급한 기사를 우연히 발견하여 잠깐 소개해본다. ‘신프랑스요리 10가지 조리법’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는 누벨 퀴진을 신(新)프랑스요리로 번역해서 실었다.

‘미식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맛보았으면 하는 프랑스 요리의 최고 요리사로 지난해 지스카르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드뇌르 훈장까지 받은 일군의 요리사들이 신프랑스요리를 개발해냈다. 최고급 음식점임을 표시하는 별 3개짜리 리용의 식당주인이며, 프랑스 미각의 대표자로 알려진 요리사 폴 보큐즈를 비롯해 맹셰리, 트롸그로, 상드랭, 비유, 비에, 게라르, 샤펠, 베르제, 라포르트 등 일류 요리사들이 말하는 신프랑스요리란 바쁜 현대인 생활에 적응토록 만들어진 요리를 말한다. 신프랑스요리는 ‘요리의 예술’이라 해서 한가하게 공들여 만드는 그런 요리가 현대생활에 알맞지 못하기 때문에 출현한 것.… 사람들의 입맛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음식 섭취량은 소량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신프랑스요리의 출현은 미식을 최대의 긍지로 삼는 나라 프랑스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1976년 6월 24일자 경향신문

또한 이 기사에서는 마지막에 누벨 퀴진의 십계명을 ‘신프랑스요리 10가지 조리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누벨 퀴진 십계명
by 앙리 고 & 크리스티앙 미요

① 육류, 생선, 채소의 조리시간을 짧게 한다.
② 싱싱하고 질 좋은 제철 식재료만 사용한다.
③ 메뉴 수를 줄이고 더 이상 최적의 상태에서 요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고전요리는 메뉴에서 삭제한다.
④ 요리법상 의미가 없거나 의심스러운 기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⑤ 최신 노하우가 요리법상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활용한다.
⑥ 마리네이드를 사용하지 않고 야생동물을 오랫동안 숙성시키지 않는다.
⑦ 화이트루, 브라운루, 기타 무거운 소스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맑은 즙을 사용한다.
⑧ 원칙적으로 가볍고 건강하게 조리한다.
⑨ 단순함의 미각을 사용한다.
⑩ 모든 레시피의 기본은 창의력이다.

(미각혁명가 페란아드리아, 만프레드 베버-람베르디에르 지음·이수호 번역·들녘·2008)